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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갈 수 없는 지하철 선로와 같은 사랑

하늘세상이다 2010. 4. 30. 14:12

 

 

작가 조갑상의 책을 읽게 된 것은 1998년에 나와서 부산작가협회상을 받은 [길에서 형님을 잃다.]라는 단편소설집이 처음이었다. 길에서 형님을 잃다가 상을 받게 되었다기보다, 슬픈 조깅이란 단편소설이 그렇다. 어쨌든 작가 조갑상은 5년에 걸쳐 한 작품을 낼만큼 장인정신로 표현될만큼 투철한 분인 것 같다. 이번에 나와서 손에 쥐게 된 조갑상의 "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는 제목만큼이나 읽고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스토리를 꺼내기전에 인물부터 설명하자면 주인공에 40대후반의 남자로 진주곰탕집을 어머니와 누이와 더불어 일하는 김창기를 중심으로 아내 안성혜 그리고 치아교정을 해야되는 초등학교6학년된 딸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가족구성원으로 보이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김창기에게는 제3장의 제목인 "영원한 스커트 밑의 극장"의 상대자로 이선재가 나오는데, 이 여자가 바로 안성혜가 김창기로부터 추궁해서 알아야 될 바람피우는 상대자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내버린다면 이 소설은 이번에 동인문학상 후보로까지 오를만큼의 탄탄한 내러티브를 갖추지 못했을 삼류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김창기의 고3시절부터 군대를 다녀올때까지(베트남전에 참전한다.) 자신의 집에 하숙한 딸 둘을 가진 유부녀에 정희옥과의 첫 사랑이다.

쉽게 생각하면, 과거의 정희옥과의 첫사랑과 이선재와의 불륜에 얽매여 아내 안성혜와의 현재에 금이 가고 이로 말미암아 별거에 이른다는 내용이 별로 새롭게 와닿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설에 황국명선생이 말했듯이 작가 조갑상의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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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리얼리즘 소설의 해체와 갱신을 요청하면서도 엽기적 충격적인 질료나 도발적 실험적인 장치로 서사성의 빈곤을 벌충한 면이 적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조갑상의 소설에 관한 면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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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객관적 통찰에 이르는 내러티브의 완성도에 있지 않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10월달에 저자와의 만남에 직접 참여하면서 놀랐던 점은 그의 왜소한 몸과 다소 뜸들이며 평론가의 지적에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답변에 그쳤다는데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조갑상의 소설관은 어떤 작품외적인 의미를 찾기보다(이를테면 소설의 주인공 김창기가 잊지 못하는 과거와 불륜을 사회적인 윤리적 잣대로만 판가름한다면 소설의 본래의미가 묻혀버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중인물의 치밀한 심리탐색과 더불어 너무 주제론적으로 흘렀을때 작품말미에 내러티브의 힘이 상실되는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계속 빛을 발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의 작가들이 중앙문단에 비해 얼마나 열악한 현실속에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조갑상의 최근작 "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는 본인이 제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출판사와 협의하에 지어낼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소설의 인물에 40대 후반의 김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많은 직업중에 진주곰탕 사장으로 했느냐의 저자와의 만남에 나왔던 질문에 첫사랑이지만 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정희옥과 바람을 피우게 되는 상대역 이선재와의 만남을 비롯한 많은 시간들을 생각하고 행동하는데는 공무원처럼 시간에 매이지 않는 자영업자를 택했다는 그의 말에 작가의 치밀한 사고를 엿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깊은 구절로 지하철 선로를 뛰어넘어 다른 곳을 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어쩌면 평행선너머의 사랑이 과거에서 현재로 뛰어넘어와서 그를 힘들게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조갑상의 소설은 어떤 큰 주제나 사회적 의미를 보여주기보다(그것을 알아내기 위한 자세를 포함해서) 내러티브의 섬세한 관찰력에 얻어지는 작은 통찰의 기쁨이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은 독자는 1~2시간만에 책을 읽고 말지만, 작가는 몇년을 걸쳐 고민하며 책을 쓰기 때문이다. 그 시간적 간격마다 묻혀있을 보석같은 글귀들을 평행선너머의 사랑으로만 귀결시켜버린다면 너무 독자위주의 편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작가의 죽음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작가중심의 텍스트읽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지적한바 있다. 그것은 지금도 맞는 말일 것이다. 어차피 다양한 생각층위로서 작가에게로만 닫힌 작품(Work)이 아닌 독자를 위해 열린 텍스트(Text)로서 기능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갑상의 책은 부산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경우에 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공간적 지표에 몰입하며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자기 고장에 대한 관심을 이렇게 작품으로 형상화시켜줄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배려는 독자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40대후반의 김창기와 인연맺는 여자 세명에 대한 말로가 너무나 남성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소설의 구성을 위해 필요한 조치인지는 몰라도 비극적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것역시 독자로서 쉽게 단정짓기 전에 한번 더 조갑강의 "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를 읽으며 생각해봐야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어느 편 전동차가 먼저 올 것인가. 김창기 자신의 가슴 정도 깊이로 파인 땅 밑의 선로 두 가닥. 훌쩍 뛰어. 차가 들어오기 전에 저편으로 건너 올라갈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망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엉뚱한 생각을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해본 사람은 의외로 많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