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이 지은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을 읽고나서 느낀 점이 있다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번째가 우리의 말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는 점이 어원을 새롭게 발굴하며 그것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어떻게 보면 전체적인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닦음이란 그물을 가지고 동양학의 넓은 바다에 잠겨있는 수많은 보물들을 인식의 수면위로 끄집어올린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 수행이라고 볼 수 있는 "닦음"의 정체는 곧 "동양학 너머의 동양학"을 제시하며(p26) 아홉째의 가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맥을 짚으며 발굴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닦음"이 "다시함"이라고 어원적인 해석을 과감하게 하는 것에 논란의 여지는 많다. 개인적으로 한국어를 만주어의 갈래로 단정해버리는 느낌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자어도 한글의 음가를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은 어떠한 학문적인 체계로서 뒷받침되고 있는지 조금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동양학을 뛰어넘어 닦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 디딤돌이 되어야 할 동양학이 여러모로 부족해보지 않나라는 생각이다. 마땅히 한국학을 중심으로 인도나 중국의 철학을 아우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보다 확실한 근거에서는 만족을 못 얻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동양학이 없어지고 닦음의 여러가지 체험담과 그에 따른 박현선생의 지도가 이루어지는 장은 현재 그가 천통회 개벽인학교에서 정기 강좌를 맡고 있다는 저자소개가 중심으로 어느순간 올라와 버린 것에 독자로서 당혹감을 감출수 없었다.
왜냐하면 동양학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자한 처음의 기대가 후반부로 갈수록 특정 수련단체의 관점의 안경을 쓰지 않고는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고대사적으로 한국의 닦음에 대한 기원과 새로운 해석은 읽어볼만 하였다.
[인상깊은구절]
달마에게 팔을 끓어 바친 혜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참사람이 되려는 생각이 너무도 뚜렷했던 혜가는 달마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열심히 수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달마를 만나 팔가지 끊어 바친 까닭은 깨달음의 방법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방법론이 닦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거우며, 방법론을 건내는 일은 크나큰 사랑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보시 가운데 법보시를 가장 높은 보시라고 여겼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양학을 익히던 옛 사람들은 "책상을 짊어지고 스승을 쫓아가는 일이라면 천리도 멀게 여기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이 또한 방법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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