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詩 향수 중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를 읊을 때면 언제나 마음이 고즈넉해집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 그가 써내려간 아내에 대한 표현은 얼마나 정겨운지 모릅니다. 무덤덤한 듯 하지만 그가 아내에게 품었을 아끼는 마음과 편안한 믿음은 아내를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남편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입니다.
1976년에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으니, 제가 가정을 꾸린지도 올해로 35년이 됩니다. 그동안 홍익의 꿈을 찾아 오로지 제 갈 길을 가느라 아내와 아이들에게 충실한 가장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가족들에게는 미안함 뿐이지만, 제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저와 함께해 준 아내에 대한 깊은 고마움이 있습니다.
아내는 참 고운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임상병리사 시험을 치르러 갔을 때, 아내는 시험 감독관이었습니다. 아내의 눈이 어찌나 예쁘고 맑은지 첫눈에 반한 저는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 말을 걸어보려고 했습니다.
저는 호기롭게 손을 번쩍 들어 시험 감독관인 아내를 불렀습니다. “내가 시험공부를 안 해서 자신이 없는데, 저 앞에 저 사람이 잘할 것 같습니다. 슬쩍 답을 보고 와서 가르쳐주면 좋겠네요, 하하하. 시험에 붙으면 제가 밥을 한 끼 대접하죠.”
수줍었던 아내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아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를 한 번 휙 쳐다보고 말았지만,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저희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첫 해부터 저는 심신수련에 심취해 있었고, 매일 새벽이면 집을 나서 밤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나마 결혼 직후에는 공무원 생활도 하고, 생수 사업도 해서 최소한의 의무는 했지만, 모악산 수행 후 단학선원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정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바삐 지냈습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나, 경제적으로 힘이 들 때, 저 때문에 오해를 받거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삶과 맞서 지내느라 외롭고 지칠 때면 아내도 무심한 제가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내는 싫은 내색 한 번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으로 저를 지켜준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파트너입니다.
지난 1998년, 미국 뉴저지에는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휘트니스 센터, CGI가 개원했습니다. 공사라고는 경험도 없고, 언어나 문화도 통하지 않아 고생 끝에 세워진 CGI(씨쥐아이)가 개원하던 날,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손수 도맡았던 아내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CGI는 뉴저지의 최고 휘트니스 센터로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12년이나 된 건물은 조금씩 수리할 곳이 나오고 있지만, 세월에 걸맞지 않게 항상 깨끗한 서비스로 고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는 CGI의 명성에 아내의 공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최근에는 뉴욕의 오래된 리조트를 인수하여 뇌교육의 세계 본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곳 역시 오래된 건물이라 수리해야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현지인들도 마다하는 어려운 관리를 여자의 몸으로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스스로 나서 그 일을 선택해 준 아내에게 저는 언제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 뿐 입니다.
한 번은 그곳의 입구를 지나가는데 꽃밭을 일구는 인부들이 보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왠지 낯이 익은 아줌마가 허리를 숙이고 열심히 호미질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아줌마가 바로 제 아내였습니다.
고왔던 아내의 손은 거칠어졌고, 하얗던 피부는 까맣게 타버렸습니다. 편한 신발을 신고 하루에도 몇 번씩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애를 씁니다. 아내가 그렇게 열심히 인 것은 제 꿈을 알고, 그 꿈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못할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이 솟아납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도 부족합니다. 아내는 제게 있어 그런 존재입니다.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하지만, 같은 홍익의 꿈을 갖고 걸어가는 아내가 있어 저는 언제나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세월이 지나 주름이 깊어지고, 피부가 거칠어져도 아내는 제게 항상 고운 사람입니다.
부부의 날을 맞아,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안부도 묻고, 언제나 고맙고 사랑한다는 수줍은 말도 해보렵니다.
2010년 5월 21일 부부의 날을 맞아 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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