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으나 이미 남의 붓으로 난도질된 역사를 한 세대 이상 되풀이해 배우고 가르쳤다. 우리 정신은 아직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상태이다. 특별연재기획의 첫 시작을 1987년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의 설립으로 잡은 것은 그 해가 사실상 단월드가 걸어온 30년 현대국학운동의 첫 사회적 발걸음을 알리는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매년 개천절 경축행사 개최, 단군상건립운동, 고조선 역사부활, 국학원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설립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잃어버린 국조단군의 ‘홍익인간’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가 설립된 1987년은 이승헌 총장(현 글로벌사이버대학교)이 단학선원을 설립한 지 3년째 되던 해였고, 1985년 서울시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알리기 위해 계획한 사직공원 내 단군성전 건립이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고 서울시장이 물러나는 등 외래의 종교와 정신에 민족정기가 흐릿해진 시기였다.
식민교육의 폐해, 강점기 보다 해방된 한국사회에서 더 큰 힘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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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노부유키 총독 |
일본 강점기 그들의 한민족 말살정책은 우리 민족의 철학 역사 문화에 대한 인식을 주인에서 노예로 바꿔 놓았다. 1919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발표한 교육시책의 요지는 “자신의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조상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 과장하여 가르침으로써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기풍으로 만들어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1945년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떠나면서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이라고 호언했다.
일본 식민교육의 폐해는 강점기 당시보다 오히려 해방된 한국에서 발휘되었다. 한국청소년은 어른을 존경하지 않으며(2001년 유니세프 면접조사 아태지역 17개국 중 꼴찌), 2008년 4월 일본청소년연구소가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청소년은 부자 되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며 돈을 벌기위해 어떤 수단도 좋다는 데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조선식민통치사에서 “조선인들은 유구한 역사적 자부심과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아 통치가 어렵다.”고 했는데 식민교육으로 성장한 세대는 자기비하에 빠졌고 긍지가 없었다. 최근에는 일부 사회 일각에서 일본 강점기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김구, 안중근,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라고까지 하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박은식 선생은 “나라가 망했어도 국혼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국혼을 내준 것이다.
민족을 깨워야한다는 대다수 국민의 목소리 결집할 구심체 없어
1948년 대한민국 초대정부에는 민족정신이 살아있는 인사들이 정부요직에서 개천절을 4대 국경일로 하고 단기연호를 쓰게 하고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천절은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행사가 되었고 단기연호는 1961년 폐지되었다.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은 2002년 교육기본법으로 개정시 2조로 변경되었다.
외세에 의한 정신침략은 우리 민족을 얼이 빠진 민족으로, 온갖 외래 종교와 사상으로 물들게 했다. 기독교에 의한 조상의 부정, 기복신앙의 발흥,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인한 남북의 대립 등 하나의 구심점을 잃은 채 우리 민족은 갈래갈래 찢겨져 있는 상황이다.
1985년 서울시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에 우리 역사를 알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민족혼을 깨워주기 위해 사직공원 내 초라한 단군성전을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한국갤럽조사에 따르면 국민 67.3%가 찬성 13.7%가 반대였다. (1985. 8. 7. 경향신문) 그러나 일부 기독교단체의 주도로 교회에서 단군은 우상이라는 구호아래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단군성전 건립계획은 무산되고 처음 제안했던 염보현 서울시장이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민족혼을 깨워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한 대다수 국민의 목소리를 결집할 구심체가 없었던 탓이다.
초기 기독교, “단군은 한민족을 단합하는 독립운동의 구심, 신앙과 배치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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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 민족교육의 원류, 명동학교의 원 모습 |
이것은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일본 강점기 초만 해도 교회에서는 십자가와 단군 할아버지 영정을 함께 전면에 두고 예배를 했다. 민족시인 윤동주를 배출한 북간도의 명동학교는 구국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기독교 학교였다. 그 교가에는 ‘단군’이 들어있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초기 기독교인에게 단군은 우리의 국조이자 역사이며 한민족을 단합하는 독립운동의 구심이었지 기독교와 배치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세에 의해 끊어져갔던 민족혼은 동족의 손에 의해 현대에 이르러도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국학을 교육하지 않는 정부의 무관심, 종교인들의 무지, 잘못된 교육 속에서 자란 세대의 외면,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다.
1987년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 창립, 현대국학운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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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 발대식 사진 |
홍익정신에 뿌리를 둔 단학을 통해서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 민족정신광복운동을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해 8월25일 발기대회 및 창립총회는 88서울올림픽에 전 세계인이 한반도로 모이기에 앞서 우리가 외국인에게 알려야 할 것이 남대문이나 호돌이가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과 철학이기에 민족정신 부활이 시급한 시기임을 국민에게 알리는 의미를 담고 있는 행사였다. 당시 이 민족을 걱정하고 민족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대부분 대종교나 유림의 노인들뿐이었고 이론만 있지 실천방법이 없었다. 국조 단군은 무속의 대상으로까지 취급되던 때였다.
당시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의 총책을 맡은 37세의 이승헌 본부장은 초대 문교부장관으로서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녔던 안호상 박사를 찾았다. 사그라지는 민족정신에 답답함을 느꼈던 안호상 박사는 젊은 그를 보고 “자네 눈빛에서 희망을 걸어도 되겠다.”며 흔쾌히 창립총회에서부터 함께했다.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 박사는 교육법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교육이념으로 넣었던 장본인이다. 정부수립 당시 근대적 서양식 법제정을 토대로 법령이 완비되는 시절, 주변의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이념만은 우리 선조들의 평화철학인 ‘홍익인간’으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여 교육법 제1조에 반영했다.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채택한 배경을 당시 '문교개관'에는 "홍익인간은 우리나라 건국이념이기는 하나 결코 편협하고 고루한 민족주의 이념의 표현이 아니라 인류공영이라는 뜻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정신과 부합되는 이념이다. 홍익인간은 우리 민족정신의 정수이며, 일면 기독교의 박애정신, 유교의 인 그리고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되는 전 인류의 이상이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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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 주최 <성조단군숭봉국민대회> |
안호상 박사는 독일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3년부터 해방 때까지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있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 한 여름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안 박사를 졸랐다. 안 박사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그럼 창문과 문을 모두 잠궈라!”하고 단군조선과 우리 민족정신에 대해 이야기 해주곤 하여 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평생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국사찾기협의회를 구성해 식민사관에 기초한 국정교과서시정을 요구했던 안 박사는 98세 임종을 앞두고 병상을 찾은 이승헌 총장이 “백수는 넘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위문하자 “자네가 있어 눈을 감을 수 있네. 부디 이 민족의 정신을 살려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안호상 박사와 당시 이승헌 단학선원 설립자가 주도한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9월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역사적인 ‘성조단군숭모대회’를 개최했다. 국조 단군이 민족과 인류의 대성인임을 선언한 이 행사의 대회장에 안호상 박사, 집행위원장에 이승헌 본부장이 맡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해 당시 대선에 출마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후보들을 비롯해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 LG 구자경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등 사회 각계 인사가 고문을 맡았다.
“그냥 건강 차원에서 단학만 보급하면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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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 이승헌 집행위원장 |
지금은 단월드가 전 세계에 1천여개의 센터를 가진 세계 최대의 명상교육기관이 되었지만 당시는 85년 1호 단학선원(현 단월드)을 설립한 이후 15개 지원으로 늘어났던 때였다. 전국에 지원이 늘어 규모는 커졌으나 전반적으로 운영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여서 이 총장이 직접 부업으로 활공(상대의 몸을 두드리거나 누르며 기혈을 조절하는 치유법)을 해서 운영을 몸소 감당하던 때였기에 설립 3년째 민족정신광복운동본부를 발족하며 민족정기 회복을 향한 행보에는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15개 지원운영과 동시에 민족정신 교육을 함께 해갔던 당시 일부 회원들이 이탈하기도 했고 가까운 이들은 그냥 건강 차원에서 단학만 보급하면 좋지 않겠냐며 그의 행보를 말리기도 했다.
이승헌 총장의 저서 ‘한국인에게 고함’에 보면 “이 일로 해서 내가 무속인 취급을 받고 종교성 시비에 휘말리고 사회에서 오해받거나 탄압받을 것을 알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었다. 깨닫고 나서 내가 알게 된 민족의 철학과 정신이 나를 당당하게 만들었고, 나에게 활동할 수 있는 힘과 기반이 되어 줬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단월드는 87년 민족정신광복국민운동본부를 시작으로 민족정신교육과 개천절을 기념하는 개천경축행사를 민간차원에서 복원하여, 매년 국내 및 해외 동포사회에서도 개최하는 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또한, 98년 IMF로 국난을 겪고 있을 때 민족의 구심점 회복을 위해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건립을 발의해 전국 각지에 369기의 단군상이 건립되기도 했다. 물론, 단순한 건강 차원에서의 단학보급을 넘은 그 행보로 인해 설립자와 단월드 앞에 놓인 발걸음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이것이 1980년부터 이승헌 총장 한 사람이 공원에서 시작해 단학선원을 중심으로 30년간 전개되어 온 현대 국학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국학뉴스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