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영화와 몽정기
수십억의 정자 중에 운 좋게 머리를 먼저 집어넣은 정자는 난자와 만난 뒤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합성되어 보통 10개월 정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내게 된다. 이 후 세상 밖으로 울음소리와 함께 빛을 보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어른이 되기까지 타의로 길러지게 되고 자의로 홀로서기까지 많은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누구나 겪었을, 그렇기 때문에 잊지 못할 상처이자 추억의 시공간이 바로 성장기다.
이러한 성장기를 다룬 작품들은 어떤 장르에서 요리가 되든 지간에 누구나 정서적으로 공감될 영역이 높기 때문에 일단은 작품 안으로 쉽게 흡수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러한 작품이 가지는 보편적 정서가 치열한 삶의 의식적 자각없는 관습적 코드에 빠질 우려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관습적 코드가 상업적 코드와 맞물려 탄생한다면 그것은 성장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 공감은 하면서도 내심 부자연스럽고 덜 숙성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한 아이가 자라면서 가정에서부터 학교를 다니며 새롭게 눈 떠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는 몽소 아르멘디리스의 [내 마음의 비밀] 외에도 많다. 정초신 감독의 [몽정기]는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성장영화]라는 데 주목을 끌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성장기를 다룬 작품들은 어떤 장르에서 요리가 되든 지간에 누구나 정서적으로 공감될 영역이 높기 때문에 일단은 작품 안으로 쉽게 흡수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러한 작품이 가지는 보편적 정서가 치열한 삶의 의식적 자각없는 관습적 코드에 빠질 우려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관습적 코드가 상업적 코드와 맞물려 탄생한다면 그것은 성장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 공감은 하면서도 내심 부자연스럽고 덜 숙성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한 아이가 자라면서 가정에서부터 학교를 다니며 새롭게 눈 떠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는 몽소 아르멘디리스의 [내 마음의 비밀] 외에도 많다. 정초신 감독의 [몽정기]는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성장영화]라는 데 주목을 끌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남학교에 교생실습으로 잠시 들어오게 되는 [김유리]의 등장과 함께 사건이 시작된다. 아리따운 교생 김유리는 네 명의 중학생(동현, 석구, 상민, 영재)들에게 꿈속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캔디]였고 이는 곧 [몽정의 대상]인 셈이다. 이러한 단면적 구도에 공병철 담임선생과 김유리 교생선생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내막이 아이들의 성적 모험담과 더불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쉽게 말해 사춘기 소년들의 성적 모험담과 함께 학생과 선생의 사랑을 버무린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몽정기]에는 교생의 위치에 대해서도 학생과 선생의 중간자적 역할만이 아닌 새로운 각도에서 관찰될 필요가 있어진다. 고3시절 담임선생님과의 꿈같은 1년을 간직하고 있던 [캔디 김유리]가 5년의 기다림 끝에, 그렇게 고대하던 [테리우스 공선생]과의 연정이 교생이라는 위치에서 연결고리를 다시 찾고자 한다. 하지만, 고지식한 노총각 공선생은 [스승은 스승이고, 제자는 제자다]는 원칙으로 몇 번이고 무시하고 넘어간다.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공선생은 아직도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 김유리로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자들이 몽정의 대상 [캔디]로서의 시선에 자신도 함께 하는 것에 놀라면서(그리고 계속된 김유리의 구애 속에) 고심을 한다. 이미 신체적으로 완숙해진 교생 김유리가 5년의 세월이나 기다렸다는 것은 영화 [클래식]의 비현실적 로맨틱 러브스토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장르론적 기만과 남성적 이데올로기
한국영화에서 성장영화가 왜 이렇게 빈약한 터반위에 상업적 코드로만 의지하며 멀뚱히 쳐다보다 마주치는 민망함에 고개 돌려야 되는지 [몽정기]만은 아닐 것이다. 곽지균 감독의 [청춘]역시 터널로서 표현되어 충분히 담아낼 수 있었던 성장영화가 성적코드로만 학창시절의 계보가 이어져야 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의 [몽정기]가 사춘기의 성적 호기심만으로 채우면서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의 구운몽처럼 알아서 성장해 가는 모습은 [성장영화]라는 [장르의 기만적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남성적 이데올로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장소설이나 성장영화에 차별화 되어 대상화되는 [여성]에 있다.
장르론적 기만과 남성적 이데올로기
한국영화에서 성장영화가 왜 이렇게 빈약한 터반위에 상업적 코드로만 의지하며 멀뚱히 쳐다보다 마주치는 민망함에 고개 돌려야 되는지 [몽정기]만은 아닐 것이다. 곽지균 감독의 [청춘]역시 터널로서 표현되어 충분히 담아낼 수 있었던 성장영화가 성적코드로만 학창시절의 계보가 이어져야 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의 [몽정기]가 사춘기의 성적 호기심만으로 채우면서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의 구운몽처럼 알아서 성장해 가는 모습은 [성장영화]라는 [장르의 기만적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남성적 이데올로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장소설이나 성장영화에 차별화 되어 대상화되는 [여성]에 있다.
성장영화의 홀로서기
[몽정기]에 나오는 아이들은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기보다 학교나 그 주변을 배회하면서 포르노잡지나 보며 희희덕거릴 뿐이다.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에서조차 방안에 갇히거나 꿈속을 유영할 뿐이다. 성장영화로서 홀로설 수 있는 땅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잃어버린지 오래이고,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도 성년식이 장미 한 송이로 대신하는 것이 전부인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유희는 누구나 겪었던 보편적 정서라는 점에서 충분한 공감에 젖을 수 있을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성장영화가 학교 안에서의 추억만이 아닌 현실 밖으로 거침없이 나가게 만드는 [성장의 힘]이 되기에 너무나 부족한 게 사실이다.
기억의 유희는 누구나 겪었던 보편적 정서라는 점에서 충분한 공감에 젖을 수 있을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성장영화가 학교 안에서의 추억만이 아닌 현실 밖으로 거침없이 나가게 만드는 [성장의 힘]이 되기에 너무나 부족한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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