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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눈의 아주머니

하늘세상이다 2010. 6. 29. 13:28

공원지도와 다른 여러 일들을 병행하며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어느날 병리실에 앉아 있는데 문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머니였는데 눈이 이상하게 생겼다. 한쪽 눈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 흰자위만 보이고, 나머지 한쪽 눈도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데다 눈빛도 아주 불안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여자 아이와 사내 아이를 데리고 쭈볏쭈볏 들어섰다. 아이들 둘은 얼굴이 누렇게 떠 있고 비쩍 말랐는데도 배만 볼록했다. 간에 심한 이상이 있다는 느낌이 왔다.

 

병리실은 병원도 아니고 오다가다 들를 수 있는 곳도 아니어서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들 학교 양호선생이 아이들 건강이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했다. 병원에 갔지만 검사비가 너무 비싸 발길을 돌리려는데, 병원의 한 직원이 나를 소개해주어서 왔다고 했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이들은 심한 황달이었다.

 

아주머니는 검사비라며 내게 꼬낏꼬깃한 만 원 짜리 지폐 한장을 내밀었다. 만 원으로는 두 녀석 중에 한 녀석밖에 검사를 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녀석 다 검사를 해주었다. 아니나다를까 입원을 해야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니, 어쩌다 애들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들었습니까?"
아주머니 혼자 애 둘을 키우는데, 정해진 직장도 없어서 어쩌다 생기는 도로공사 부역에 나가 받는 몇 푼으로 근근히 먹고 산다고 했다. 아이들이 몇 달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고 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 했다. 풀이 죽은 아주머니는 계속 "병원은 못 가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아이들을 데리고 일어섰다. 참으로 딱하고 안쓰러웠다. 나는 검사비로 받은 돈 만원을 아주머니 손에 다시 쥐어주며, 내가 소개해준 약국으로 가보라고 했다. 병원 갈 형편은 도저히 안 되니, 아이들이 약이라도 먹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두 녀석을 잠깐이나마 활공을 해서 보냈다.

 

아주머니가 문을 나서자 나는 그 약국에 전화를 했다. 내가 약사감시원으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마음이 잘 통하는 약사였다.
"잠시 후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애 둘을 데리고 갈 건데, 아무말 말고 아주머니가 내미는 돈만 받게. 그리고 아이들 증세에 맞는 약을 제일 좋은 걸로 열흘치씩만 눈 딱 감고 지어 주게나."
겨우 원가나 나올까말까 할건데,  그 약사는 고맙게도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안양 시내의 모 초등학교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간염검사를 해야하는데, 나더러 그 일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눈이 이상한 아주머니가 데리고 온 아이들이 바로 이 학교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은 그날 그렇게 지어준 약을 먹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아 버렸다. 아주머니가 이 일을 양호선생에게 이야기했고, 양호선생이 교장선생에게 보고해, 이왕 하는 간염검사를 내게 맡기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초등학교의 검사가 겨우 마무리되어 한숨을 돌릴 무렵, 또 다시 다른 초등학교에서 검사를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그 교장 선생이 안양시 교장단 회의에 참석해서 또 그 아이들의 일을 모든 교장에게 이야기해서, 여기저기서 검사요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안양 시내 거의 모든 초등학교가 나에게 검사를 요청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그 일만 하느라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리저리 변통했던 크고 작은 빚들을 죄다 청산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주택에 살다가, 좀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나중에는 안양시가 아닌 광명시의 초등학교에서도 요청이 들어왔다. 이렇게 밀려오는 검사 수요를 당해 내려면 간호사도 몇 명 더 뽑고, 차도 한 대 더 장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날도 나는 검사장비를 차에 싣고 간호사와 함께 광명시의 한 초등학교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중간쯤 가다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이 정도면 가족들은 먹여살릴 수 있지 않나. 내가 돈 벌려고 마음 먹었으면 예전의 직장을 그냥 다녔지. 이건 내가 아니야."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뜩 차려졌다. 그 이후 나는 간염검사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나에게는 나의 사명이 따로 있는데, 이제 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와 아이들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장만하겠다고 그렇게 곤역을 치룬 건데, 마침내 때가 왔구나. 이제부터는 정말 내일을 할 수 있겠구나.

 

나는 그 아주머니를 그때 이후로 다시 보지 못했다. 그 아주머니로 인해 시작된 그 일련의 일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꾼 것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가끔은 그 이상한 눈의 아주머니와 두 녀석이 하늘에 내게 보내준 천사가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새삼 모든 인연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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