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와 함께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에 이어 이번에 이형래님의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를 읽게 되면서 차츰 참종교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와도 쌍벽을 이룰만큼의 저서가 최근에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구입하게 된 이 책은 그러나 전 작의 종교학적인 접근과 다르게 민족과 역사학적으로 비판하므로 어떻게 보면 이번의 책이 훨씬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와도 쌍벽을 이룰만큼의 저서가 최근에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구입하게 된 이 책은 그러나 전 작의 종교학적인 접근과 다르게 민족과 역사학적으로 비판하므로 어떻게 보면 이번의 책이 훨씬
더 쉽고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오강남 교수는 종교학적으로 타 종교의 배타나 이단시에 대해서 어린아이의 학년 오르는 것처럼 비유하며 설득하는 것에 비해서
왜냐하면 오강남 교수는 종교학적으로 타 종교의 배타나 이단시에 대해서 어린아이의 학년 오르는 것처럼 비유하며 설득하는 것에 비해서
이형래님의 저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뿌리를 시작으로 일제시대에 정점에 이르렀던 [배반의 기독교사]를 다루고 있기에 그 충격은 상당했기 때문이다.
책을 만나기 전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나 병인양요로 이어지던 서양 선교사들의 죽음 밖에는 알고 있던 지식이 전무하던 내게 이 책은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전파되었을 때부터 얼마나 비애국적이고 이기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을만큼의 강도높은 비판을 역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단추이자 뿌리가 되는 시기가 한민족의 큰 시련기였던 임진왜란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귀무덤과 코무덤처럼 잔악하기 그지없던 왜놈들이 나중에 받게 될 정신적인 상처를 고해성사를 통해 도와줬다는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세스뻬데스] 신부의 이야기는 곧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다는 저자의 비유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없음에 공감하였다.
책을 만나기 전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나 병인양요로 이어지던 서양 선교사들의 죽음 밖에는 알고 있던 지식이 전무하던 내게 이 책은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전파되었을 때부터 얼마나 비애국적이고 이기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을만큼의 강도높은 비판을 역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단추이자 뿌리가 되는 시기가 한민족의 큰 시련기였던 임진왜란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귀무덤과 코무덤처럼 잔악하기 그지없던 왜놈들이 나중에 받게 될 정신적인 상처를 고해성사를 통해 도와줬다는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세스뻬데스] 신부의 이야기는 곧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다는 저자의 비유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없음에 공감하였다.
이것은 조선침략과 한일병합이 하나님의 섭리라며 민족 보다도 기독교전파에 더 열을 올렸던 [황사영]이나 [김대건신부]를 역사적으로 탄생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지금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뻔뻔함과 이기주의를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모른다.)
지금의 교파 이기주의는 민족의 생사가 달린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친일이니 친미 혹은 외면으로 현실에 안주하게 된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찾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책에 담겨져 있었다.
그 중에 [제9장 민족정신을 앗아간 1907년 대부흥회]에 나오는 [길선주 목사]에 대한 부분은 오늘날의 현실참여에 이득여부로 선택하는 교회를 비판함에 상당부분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나라가 빼앗긴 일제식민시대에서 [치외법권의 안전지대]가 된 교회에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그것은 종교의 선택이라기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이었다) 신도들이라는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길선주가 일본인까지 미워하지 말라는 회개와 같은 반 민족적인 작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책의 285쪽에
"그런데 선교사들은 예수를 버렸다. 순수한 교회를 요구하며 권세에 복종을 강조한 선교사였다. 그들의 회유책은 항일이나 반일 같은 정치적 불법 행동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일제의 침략정책의 묵시적 지지였다. 예수의 가르침을 저버린 비급한 기회주의적 권력과의 야합이었다. 바로 이 점이 선교사들과 대부흥회의 주도적 역할을 한 길선주 목사가 역사적 심판을 받는 이유다."
라는 대목을 읽으며 종교는 옷처럼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나 민족은 몸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정체성이자 뿌리임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진리를 말한다는 종교의 참 목적이 교파의 확장에 있다기 보다 로마의 식민지 청년이었던 예수님의 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닮는 성직자들이 별로 없기에 지금처럼 종교간의 전쟁에 수많은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만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나왔던 [부시맨]이란 영화에서도 코카콜라가 오지의 마을에 떨어지고나서 부시맨이라 불리던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이 겪는 해프닝이 너무나 제국주의적인 시각으로 담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고 많이 놀랐었다. 그 [콜라]가 보여주는 물질주의적 우월성과 함께 의료나 교육으로 순수한 것처럼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미소뒤에 제국주의의 야만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지난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현대에도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세계역사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는 탈종교적이고 역사주의적으로 접근으로우리나라의 역사에 개입한 기독교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지금의 교파 이기주의는 민족의 생사가 달린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친일이니 친미 혹은 외면으로 현실에 안주하게 된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찾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책에 담겨져 있었다.
그 중에 [제9장 민족정신을 앗아간 1907년 대부흥회]에 나오는 [길선주 목사]에 대한 부분은 오늘날의 현실참여에 이득여부로 선택하는 교회를 비판함에 상당부분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나라가 빼앗긴 일제식민시대에서 [치외법권의 안전지대]가 된 교회에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그것은 종교의 선택이라기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이었다) 신도들이라는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길선주가 일본인까지 미워하지 말라는 회개와 같은 반 민족적인 작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책의 285쪽에
"그런데 선교사들은 예수를 버렸다. 순수한 교회를 요구하며 권세에 복종을 강조한 선교사였다. 그들의 회유책은 항일이나 반일 같은 정치적 불법 행동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일제의 침략정책의 묵시적 지지였다. 예수의 가르침을 저버린 비급한 기회주의적 권력과의 야합이었다. 바로 이 점이 선교사들과 대부흥회의 주도적 역할을 한 길선주 목사가 역사적 심판을 받는 이유다."
라는 대목을 읽으며 종교는 옷처럼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나 민족은 몸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정체성이자 뿌리임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진리를 말한다는 종교의 참 목적이 교파의 확장에 있다기 보다 로마의 식민지 청년이었던 예수님의 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닮는 성직자들이 별로 없기에 지금처럼 종교간의 전쟁에 수많은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만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나왔던 [부시맨]이란 영화에서도 코카콜라가 오지의 마을에 떨어지고나서 부시맨이라 불리던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이 겪는 해프닝이 너무나 제국주의적인 시각으로 담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고 많이 놀랐었다. 그 [콜라]가 보여주는 물질주의적 우월성과 함께 의료나 교육으로 순수한 것처럼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미소뒤에 제국주의의 야만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지난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현대에도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세계역사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는 탈종교적이고 역사주의적으로 접근으로우리나라의 역사에 개입한 기독교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Write > 좋은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이해인 수녀와 필적할만한 베트남 승려 틱낫한 (0) | 2010.04.30 |
---|---|
동양을 위하여 동양을 넘어서 (0) | 2010.04.30 |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높은 효과를 가져올 운동법 (0) | 2010.04.30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0) | 2010.04.30 |
스승과 제자, 그 아름다운 동행길 (0) | 2010.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