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을 읽어나가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논문을 읽는 수준만큼이나 난해한 어구들 때문에 적잖은 곤혹을 치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독일을 다루는 단락에서는 번역상의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독일사에 대한 인식부족도 한몫해서 그런지 이해상의 어려움이 많았던 게 사실이었다. 반면에 일본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관련이 깊은 나라라는 인식아래, 몇 번 여행도 다녀왔고 관련 도서도 많이 읽었다는 배경지식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점이 어떻게 보면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아우슈비츠보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난징대학살에 보다 중점적인 심적 동요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특히, 난징학살에 대한 부분은 한국이 피해국으로서 그에 못지않은 대량학살이 관동대지진(한국사람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허황된 소문으로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과 같은 곳들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관심있게 읽었다.
네덜란드인 이안 부르마의 관점에서 바라본 독일인과 일본인의 전쟁기억이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역사교육을 받고 자라난 한국인인 나에게 편향된 감상에 빠지지 않는가라는 조심스러움과 함께 최대한 저자의 중립적 입장을 배려하며 나의 주관적 감상을 보태고자 한다. 번역서는 원래 역자가 중요하다. 역자 해설의 마지막 부분에 그의 번역의도가 나온다. [제3자의 관점에서 전후 독일과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이 책이 단순히 반일감정과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맹목적 열광의 양극단을 오가는 우리의 일본관에도 하나의 교정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역자의 바람이다]
물론 제 3자는 중요하다.(그렇다고 제3자라고 해서 꼭 중립적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법이지만)그는 자국의 라이덴 대학에서 중국학을 전공하고 일본대학에서는 일본 영화를 전공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면서도 역사가 못지 않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현장탐방 그리고 신문기자처럼 독일과 일본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대화를 오고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능력은 소설가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저자의 발 빠름에 제 때 발맞추지 못하는 독자에게 무리가 따를 수도 있는 책이었다.
제3자가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접근방식을 통한 역사인식은 분명히 필요하다. 엄연히 대립하는 좌익과 우익정치인이나 보수와 진보주의자 그리고 가해자의 2세로서의 위치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이들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상을 이루고 있음을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분히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 해박한 지식에 어떻게 어우러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여러 번은 곱씹어봐야 의미가 충분히 소화될 부분이 적지 않아 딱 이 책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도출하기가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몇몇 인상받은 대목이 있다면 아무래도 2부의 [난징학살을 찾아서]와 3부의 [전범재판의 풍경]과 함께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2부의 난징학살은 독일의 나치가 1938년 11월 9일 밤에 " 수정의 밤"이라 불리는 3만 명 이상의 유대인 박해사건이상으로 엄청난 살육처인,“홀로코스트”로서 부인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 한 가지 예로 젊은 일본군 장교인 N중위와 M중위가 난징으로 진군하는 도중 서로 검술을 겨뤄 보기로 하고, 먼저 중국인 100명의 머리를 베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정하는 그들의 게임이 난징학살 생존자들 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끔찍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는 대량학살로서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인간성 말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전쟁의 피해자로만 알려지다가 난징대학살이 수면위로 오르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는 점이다. 그 때가 1980년대 후반이자 1990년대로 들어가는 정점이었는데, 전쟁의 모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천황의 죽음앞에 모토시마 시장의 발언이 우익단체로부터 큰 타격을 받게 되고, 한 극우주의자에 의해 피격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할 때, 저자는 모토시마를 독일의 1988년 11월 10일 “수정의 밤” 50주년 기념일에 의사당에서 연설한 서독 연방의회 의장인 필립 예닝어와 비교하며 독일과 일본의 전쟁기억에 대한 상반된 의식을 보여주는데, 충분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민족주의적인 반일감정은 세계인들의 공감과 일본내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이끌어내는데 걸림돌이 될거라는 사실이다. 보다 세계사적인 보편타당한 관점속에 민족주의적 주체성을 함께 사고하고, 행동해나갈 필요가 있음을 배울 수 있던 책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된다.
[인상깊은구절]
야스퍼스는 모토시마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정의감도 모토시마처럼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타미는-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기독교-그리고 소위 수치의 문화와 죄의 문화의 구별-는 결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모토시마는 일본의 터부를 깸으로써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한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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