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좋은 Culture
젊음의 신화-장국영을 추모하며
하늘세상이다
2010. 4. 30. 16:06
기억의 상처가 공포를 낳는다?
[짐]은 [얀]이 어린시절에 부모의 이혼때문에 상처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 상처의 기저에 깔린 불안과 두려움이 귀신같은 착시를 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정신과 의사 [짐]은 전형적인 과학주의자로서 처음부터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역할은 정신심리로서 [얀]을 안정시키고, 상담심리로서 부모와 다시 만나
화해를 하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얀]의 과거는 현재의 나무가 제대로 자라기
힘든 균열된 토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뿌리가 취약한 나무는 주변의 소리에
쉽게 반응한다. 균열된 과거의 토양이 마치 현재의 상처입은 귀신의 손이 되어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공포는 그렇게 파생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 의식의 경계선 허물다.
[짐]으로부터 상처를 치료받은 [얀]은 [짐]과 가까워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짐]은 [얀]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짐]의 의식은 두텁게 봉합되어 있다. 합리주의적인 이성주의로서 일에
파묻혀 지낼 뿐이다. 그래야만, 어떤 과거의 무의식이나 감정적인 상황도
받아들일 공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얀]과의 만남
과 이후의 엊갈림속에(보통 동양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업장과 거의 같이
쓰인다.) 그동안에 봉합된 의식층들은 사랑의 감정에 녹아들게 된다.
조화로운 의식, 해원이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고 분노하며 그를 찾아나섰던 어느 노부부의
갑작스런 출현은 [짐]의 의식층을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얀]은 [짐]이
과거의 기억조각들을 찾기 위해 몽유병환자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식에 침전되지 못한채 떠돌다가 의식의 알람시계로
다시 돌아오는 반복에 [얀]과 [짐]의 친구는 그를 병실로 데려간다.
[얀]과의 사랑에 의식의 경계선이 허물어질수록 그의 묻혀진 과거의 연인이
혼령이 되어 나타난다. 이를테면, 귀신이 [얀]을 질투해서 출현했다기 보다
[짐] 스스로의 경계선 허뭄이 곧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지만 죽어버린 옛 연인
을 기억회상처럼 불러온 것이다.
혼령을 믿지 않고, 과거의 기억을 이성으로 묶어버리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
어디에도 자유롭지 못한 [짐]을 풀어준 것은 [얀]의 사랑이자 과거의 [그녀]가
보여준 [해원]에 있을 것이다.
*젊음의 신화-장국영*
장국영은 [영웅본색]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죽음을 보여주었지만,
만우절에 그는 현실의 절벽처럼 높은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영화 [이도공간]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한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짐]처럼 그도 영화와 현실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채, 경계의 절벽에 몸을 던지고 만 것은 아닐런지......
장국영은 결코 일류 스타는 아니었다. 영화마다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거짓말처럼 와락 대중을 놀라게 만들었고, 또 그렇게 3주기가
잊혀지는 대중의 무상함처럼 되는 것에 참 억울하고 아쉽고 그리워질 뿐이다.
그는 참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살아있다면, 지천명이 되는 50살을 넘은 나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나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없다는 외연적 발견보다 그의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는
열정과 아름다운 사랑이 그를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로 대중의 가슴에 거울처럼
비춰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짐]은 [얀]이 어린시절에 부모의 이혼때문에 상처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 상처의 기저에 깔린 불안과 두려움이 귀신같은 착시를 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정신과 의사 [짐]은 전형적인 과학주의자로서 처음부터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역할은 정신심리로서 [얀]을 안정시키고, 상담심리로서 부모와 다시 만나
화해를 하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얀]의 과거는 현재의 나무가 제대로 자라기
힘든 균열된 토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뿌리가 취약한 나무는 주변의 소리에
쉽게 반응한다. 균열된 과거의 토양이 마치 현재의 상처입은 귀신의 손이 되어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공포는 그렇게 파생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 의식의 경계선 허물다.
[짐]으로부터 상처를 치료받은 [얀]은 [짐]과 가까워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짐]은 [얀]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짐]의 의식은 두텁게 봉합되어 있다. 합리주의적인 이성주의로서 일에
파묻혀 지낼 뿐이다. 그래야만, 어떤 과거의 무의식이나 감정적인 상황도
받아들일 공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얀]과의 만남
과 이후의 엊갈림속에(보통 동양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업장과 거의 같이
쓰인다.) 그동안에 봉합된 의식층들은 사랑의 감정에 녹아들게 된다.
조화로운 의식, 해원이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고 분노하며 그를 찾아나섰던 어느 노부부의
갑작스런 출현은 [짐]의 의식층을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얀]은 [짐]이
과거의 기억조각들을 찾기 위해 몽유병환자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식에 침전되지 못한채 떠돌다가 의식의 알람시계로
다시 돌아오는 반복에 [얀]과 [짐]의 친구는 그를 병실로 데려간다.
[얀]과의 사랑에 의식의 경계선이 허물어질수록 그의 묻혀진 과거의 연인이
혼령이 되어 나타난다. 이를테면, 귀신이 [얀]을 질투해서 출현했다기 보다
[짐] 스스로의 경계선 허뭄이 곧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지만 죽어버린 옛 연인
을 기억회상처럼 불러온 것이다.
혼령을 믿지 않고, 과거의 기억을 이성으로 묶어버리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
어디에도 자유롭지 못한 [짐]을 풀어준 것은 [얀]의 사랑이자 과거의 [그녀]가
보여준 [해원]에 있을 것이다.
*젊음의 신화-장국영*
장국영은 [영웅본색]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죽음을 보여주었지만,
만우절에 그는 현실의 절벽처럼 높은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영화 [이도공간]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한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짐]처럼 그도 영화와 현실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채, 경계의 절벽에 몸을 던지고 만 것은 아닐런지......
장국영은 결코 일류 스타는 아니었다. 영화마다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거짓말처럼 와락 대중을 놀라게 만들었고, 또 그렇게 3주기가
잊혀지는 대중의 무상함처럼 되는 것에 참 억울하고 아쉽고 그리워질 뿐이다.
그는 참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살아있다면, 지천명이 되는 50살을 넘은 나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나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없다는 외연적 발견보다 그의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는
열정과 아름다운 사랑이 그를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로 대중의 가슴에 거울처럼
비춰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